① 약점을 죄로 여겨야한다.
약점을 단순히" 그게 내 천성인걸!," "나도
어쩔수 없어! 나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라는 식으로 변명하지 말아야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단점과 약점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약점 쓰레기더미를 방치하고 있거나 회피하려고 한 다.죄가 무엇인가? 그것은『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의지박약, 불안,이기심,자만,성급,잔인,우울,자기중심적,비판적,비관,게으름, 조롱,고집, 우유부단...! 아름다운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 하시는것이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누더기들을 걸치고 사는것을 원치 않으신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인간도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 오... 여러분은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말다툼과 비방과 모든
악의를 버리고,서로 친절하게 대하 며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0- 32)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근심거리라는 것이다.버려야할 쓰레기라는 것이다. 위의 도표는 우리의 각 기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단점들이
어디로부터 궁극적으로 비롯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모든 단점들은 크게는 분노와 두려움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이 분노와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분노의 변형된 16가지
: 격분,증오,폭동,시기,공격,험담,야유,앙심 비통,악의, 불평,질투,후회,편협,비난,원한
▶ 공포의 여러가지 표현 :
근심,의심,소심,우유부단,미신,움추림,고집,시비 걱정,열등감,비겁,혐의,주저,실망,교만,수줍음
다혈질과 담즙질이 가지기
쉬운『분노』의 여러 유형들과 우울질과 점액질이 가지기 쉬운『두려움(공포)』의 여러가지 유형들을 살펴보라.이 소름끼치는 더러운 것들은 왜,
무엇때문에 우리의 심령속에 생성하는가?
그렇다.그 냄새나는 흙탕물의 근원에는 바로『이기심』이라는 독샘이 자리하고 있다.이기심이란
자기본위주의,자기중심주의를 말한다.이기심이란,말 그대로 『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싶고,내가 누리고 싶고, 내가
받고싶은 것에 대해 충족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한다. 시기하고 불평한다.내게 있는 것을 잃게될까, 내가 손해보게될까, 내가 인정
받지 못할까, 나의 기득권이 달아나게 될까 싶기 때문에 우리에게 덤벼드는 것이 두려움이다. 공포요 염려요 수줍음 이며 열등감이다.이것이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사탄(사14), 아담과 이브(창3), 그리고 가인이 근본죄 악이도 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비인도적인 잔인성, 태고적부터 20 세기에 이르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문제와 슬픈 사건들은 모두 바로 이 이기심때문이었다.이기심이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물론 여러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결국은 사탄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다.하나님과 이웃을
배제하고 오직 나 자신만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것.. 이것이 죄이다.이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결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길은
없다.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 이기심이 바로 우리 인간자신들을 분노케하고 두렵게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불행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주범(主犯)임을 알고 계신다.그리고 이것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기억하라.이기심이라는 근원에서 나오는 모든 이러한 쓰레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인간에게 내리셨 던 축복이 아니다.그것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시고 미워 하신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분명히 죄이다.이것들은 사탄의
작품들이다. 이것들과 우리는 대항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적인 것이다.우리의 죄(적)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에 대한 치유를 하나님께 의뢰할 수가
있다.자! 당신은 이 죄들을 인정하라! (제안)한가지 제안하고싶다. 솔직하고도 객관적으로 자신 에게서 인정되는 약점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라.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라. 가능하다면 그 목록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면 더 좋겠다.
② 죄를 언제나 고백하라
요한1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것"이라고 약속했다.이 귀절은 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을 위해 많이 인용되는 귀절이긴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요한은『나의 자녀들아』이라는 말을 쓰고있는데 이는 그가 믿음으로인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시편
66:18에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있을때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은 효과가 없게된다.
분노와 두려움을 죄로 여기지 않아도 기도는 효과를 상실한다. 당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그것이
잘못된 죄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요한 1서 1:9절은 몇번이나 사용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가 해줄수 있는 대답은 "당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의식하고 있을 때마다"이다. 죄를 지은 시간과 고백하는 시간사이에 아무 시간적
공간을 두지 않도록 하자. 당신이 화를 낼 때 마다, 두려워하고 낙심해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즉시 하나님 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한다.
그리하였을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약속이 바로 요한 1서
1:9의 뒷부분이다. 하나님께선 그 죄에대해 더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제대로 알고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자체만으로도 용서의 조건이 되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우리는 믿어야한다. 하나님은 결 코 거짓말장이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③ 하나님께 나쁜 습관과 죄를 없이해 주실 것을 간구하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6:14-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와 공포로부터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주님 께 간구만하면
그의뜻에 따라 간구한 것은 틀림없이 응답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내 천성인 데 난들 어떡하겠어요?" 그렇다. 우리의 약점이나 결점이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고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마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고있고 또 인정해야한다.
위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간구가 틀림 없이 이루어질 것을 또한 확신해야한다.우리보다도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약점 들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없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분" (마28:18)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라.
④ 성령충만을 간구하고 그리스도안에 거하라.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충만을 받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성령을 받는다 는 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무슨
특별한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세주로 모셔들 일때 동시에 일어나는, 평생에 단 1회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우리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 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결단하는 순간 성령은 이미 우리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요한계시록 3:20의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때 우리안으로 들어오시는 이는 바로 하 나님 예수의 영(성령)이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천지차 이이다.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성령이 그안에 계시다고는 아무도 단정할수 없다. 로마서 8:9에는 "누구
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이말은 성령이 그안에 계시지 않은 이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교회도 오래 다녔으나, 그분을 당신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다면 우선 당장할 일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예수 그리소도를 당신의 마음속에 영접해 들이는
일이다.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에게만 계시며, 이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수 있다.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안에 계신 이 성령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우리의 약점을 고칠수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한번 우리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느끼든지 못느끼든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안에 계신 그분은 우리를 진리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요16:13),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며(요1 6:18),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과 미래에 대해 알려주신다.(요16:13).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며(롬8:26/ 막13:11)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며(갈5:22),우리가 옳은 일을 하도록 도우시기도 한다.(요일2:2 7).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이라는 제3인칭의 존재로 믿는자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그러므로 크리스챤이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은 "성령충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그것(성령충만)은 단순한 제안이나 요청이 아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Be f illed with the Spirit)" 라고 분명한 명령형
문장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다.오늘 날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가장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큰 문제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가운 데도 성령의 충만함과 방언을 말하거나 어떤 환상적인 체험을 하는것을 동등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란 어떤 체험 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성경은 이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면서 현재시제를 사용함
으로써 계속적인 의미로 『성령충만』은 우리일생의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다. 원어인 그리이스어를 보면 이 귀절은 "당신들 은 계 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시오"의 뜻을 지닌다.
이 성령충만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 계속 성령충만하도록 명령받았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하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우리를 두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이 우리삶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게 하라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우리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려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초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원자요 주인(主;lord)으로 모셔들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자의에 의해 우리 삶의 주권을 가지시도록 영접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통치)아래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나 꼭둑각시가 되어 로봇트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무지한 탓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압제나 횡포가 아니다.
우리는 100%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우로운 도덕적 행동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 시고 인도하시며 격려하시지만 행동은
우리가 해야한다. 애초부터 성령께선 우리안에 들어오실때 우리를 강 압적으로 마음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이후 에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압제하시지
않으신다.우리의 인격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여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교통표지판이나 이정표를 따라 자동차
연료의 힘을 입어 우리가 성루로간다고 해서 우리는 교통표지판이나 휘발유, 자동차의 노예인가? 교통법의 꼭두각시 인가? 우리가 기쁨으로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와 책망에 순종 하는것은 그 성령하나님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그 전폭적인
사랑과 신실성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방법(法)과 길을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있어 유일한 진정한 안내자이시며 또한 원동력이시다.
성령충만이란
우리인생삶의 길을 성령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라 우리가 운정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때문에 성령충만은 느낌이나 별난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감정적인 쇼킹한 경험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령충 만한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 다.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성령충만할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엡5:20)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육신의 힘으로
기쁨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신의 힘으로 우리들의 기질상의 많은 약점들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키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에겐 오히려 아름다운 성품들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갈라디아서 5:22-23에는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현대인의 성경 번역판) 여기에 나오는 목록들을
보라.앞에서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가지게 된 우리안의 쓰레기들과 어떻게 다른가? '증오.시기.험담.야유.앙심.비통.불평.질투.
후회.비난/근심.의심.우유부단. 움츠림.소심.고집.열등감.비겁.주저.실망.교만...'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기질을 갖고 있든 성령이 충만하기만 하며 그의 삶에는 이 아홉가지의 삶의 특성이 열매로 맺히고 점차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 곧 모든
이들(원수까지도)을 향한 사랑이다. 희락,곧 기쁨(joy),환경을 초월한 변함없는 기쁨이다. 화평(peace),곧 모든 두려움과 근심 대신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오래참음(long suffering:인내),즉 모든 모욕과 고통과 비난중에서도 묵묵히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자비(gentleness), 곧 부드러운 마음에서 나온 사려깊고 예의 바르고 젊잖고 신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양선(goodness), 즉
자신과 소유물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관대한 마음, 이기심 없는 모든 친절과 선한 일이다. 충성(faith)즉,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태 도,신뢰성,성실한 자세를 말한다.
온유(meekness),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절제
(self-control), 즉 자신의 기질상의 약점을 자제하는 능력,자기훈련, 자기조절 능력을 말한다. 성령께선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한 언제나 우리삶의 한부분 한부분에 개입 하실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꽃병을 집어 던진 다혈질
사람에게 성령께선 즉각적으로 그 분노가 잘못된 죄임을 지적하신다."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겠지? 그방법은 이 문제의 해결의 좋은 방법일 수
없어! 자 지금 곧 그와의 화해를 시도해라.
전화를 걸어!" 성령의 사람은 그 말씀에 동의하고 순종하게된다.그는 곧 전화기 앞으로
달려간다.다혈질의 사람으로부터 폭언과 꽃병세례를 받았던 우울질의 사람은 모욕감과 증오감에 시달린다.두통을 느끼고 이를 갈며 침대에 누워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께선 내 버려두실리 없다. "나는 네가 그 흉칙한 증오심으로 그렇게 몸과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며 있는 것이 싫다.
너의 평안이 내 기쁨이다. 그를 용서해라. 나도 너의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지 않았니? 자! 일어나거라.그에게 화해를 청해라. 그가 너의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너에겐 평화가 있게될게다. 어서 전화를 걸어라."--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찌꺼기를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약점으로 인한 실수들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싫어하므로 그는 신속히 그 실수들을 시인하고 해결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옛날의 그 편협적 이고 고 집과 독선과 혈기와 자기학대와 근심걱정의 지저분한 삶을 살고있다는 사실은 거의 전율할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이상 주인이나 통치자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다.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성 령의 지시에 계속 불순종함 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켜
버렸다.그들의 직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근심걱정으로 우울증에 걸린 목사님이나 분노와 혈기로 위궤양을 앓고있는 장로님도 사실은 성령을
무시하고 인정치 않으며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통해선 하나님께 선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수가 없다.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님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5:31) 개역성경은
여기의 성령모독을『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그 인격이 변화되어 가야함에도 불 구하고 여전히 유아적 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그정도밖에 되 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였으니 그는 분명히 성령을 모독한
것이다.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
물론 우리의 옛성품과 자아를 상대하여 싸우는 싸움은 쉬운것은 아니다. 자신의 약점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성령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다 가도 또 여전히 옛자리로 되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점이다. 그러나 기억하라.실망하지 아니하고,죄를 지었을 때마다 또 죄를 깨달았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결국에 가선 옛습관이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문득 되돌아보았을때 당신은 과거와는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나는 우울질과 다혈질이 혼합된, 극도의 소심함과
신경질적인 포악함의 사람 이었다.사람앞에 서는 것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과 이기심,예민한 성격등으로 인해 언제나 소극적이고 박약한 모습으로 지내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선 너무나 많은 부분들속에서 기적을 일으키셨다.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의 기질상 의 약점때문에 이 공동체 속에서
지체들에게 아픔을 주고 그때문에 나 스스로 자학에 빠지 곤 하는, 여전히 변함없는 우울질과 다혈질의 사람이긴 하지만, 불과 지난 몇년전과 비교만
해보아도 나의 기질적 약점들은 많이 깍이고 다음어진 것을 선명하게 확인하게된다. 나자신이 이를 위해 이를 악문 고행과 수양을 쌓았기 때문인가?
기껏 내가 한것이라곤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과의 교제를 중단하지 않은 것밖에 없다.
나는 기대한다. 지금까지도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오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남은날 동안 변함없이 나를 지도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듬어 가실 것을 말이다. 나는 나의 약점들을 매일
점검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의 적이다.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들이다. 여러번의 실패와 좌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이 적들이 난공불락의오새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 이다. 예수안에서 나는 능히 이 약점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담대하라. 승리를 확신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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